우리는 티카오 섬으로
간다.
Vacation at Ticao Island, Philippines
언젠가 친구가 나에게
여행이 뭐가 그리 좋으냐고 물은 적이 있다.
Remind, Refresh, Restart.
여행은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상기시켜주고, 지친 나를 재충전시켜주며,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거기에 좋은 사람들이 함께 한다면 그 시간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여행을
떠난다. 그 중에서도 다이빙 여행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이다.
우리 모의는 작년 늦가을부터
시작됐다. 마녀키키님이 톡을 보냈다. “내년 여름 휴가 같이 보낼래?” 필리핀에서 만타를 질리도록 볼 수 있는 곳이란다. 필리핀에도 만타가 나오나? 이름도 낯설다.
티카오? 타키오? 키타오였나? 유명한 다이빙 포인트라면
나도 웬만큼 아는데, 처음 듣는다. 그렇지만 별 고민 없이 오케이. 같이 가면 즐거울 게 분명한 멤버였으니까. 어린 딸을 대동해야 하는 우리 가족에게는 익숙하고 편한 일행들과
함께하는 것만큼 큰 이점은 없다. 또한 호기심도 생겼다. 긴 휴가를 내기 어려운 마녀키키님이 8박 9일이나 할애하며 선택한 곳은 과연 어떤 곳일까?
인솔강사 지란지교, 전체 살림꾼 마녀키키님, 떠나기 직전까지 다이빙 리조트와 네고에 애써주신 좌측님, 꽤 긴 시간 동안 일행들이 계획하고
수고한 덕분에 감사하고 죄송하게도 우리 식구는 숟가락만 얹은 여행이 되어버렸다. 그 밖에 사진작가로도 활동 중인 무지님 부부, 좌측님의 대학생 따님, 마녀키키님 형부, 분신인 꼬마마녀와 아들 승기, 우리 가족 세 명까지 총 12명이 함께하는 대규모
여행이 되었다.
티카오아일랜드리조트
직원들과 추억을 남겼다.
7월 30일
군대 간 애인 제대한
날만 손꼽는 처자처럼 한참 멀게 느껴졌던 그날이 마침내 왔다. 티카오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마닐라까지 낮 비행기를
탔지만 레가스피로 바로 이어지는 비행기가 새벽이라, 짐도 많고(수화물만 200Kg에 육박했다) 아이들도 있는 우리로서는 마닐라에서 하루 숙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인원이 많은 짐을 가지고 이동하려니 교통비가 많이 드는 건 당연지사. 돈도 시간도 드는 여정이었지만 모두의 컨디션을 생각하면 잘한
선택이었다.
레가스피 공항에서 3시간을 차로 달려와 불란항구에서 방카로 다시 2시간여를 달려갔다.
7월 31일
마닐라에서 레가스피까지
비행시간은 약 한 시간 정도 걸린다. 활주로 건너편 구름에 싸여 있는 마욘산이 픽업을 위해 나온 리조트 직원과 함께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사실 난 레가스피까지
왔으니 이제 다 온 거나 마찬가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웬 걸. 우리 일행은 두 대의 밴으로 나누어 탄 채 2시간 반을 달렸고, 항구에서 다시 티카오까지 2시간 방카를 탔다. 보통 때는 한 시간
정도면 간다는데, 엊그제 지나간 태풍의 영향인지 바다가 상당히 거칠다. 갑판 의자 위에 있던 우리는 모두 속옷까지 홀딱 젖었다. 저녁 7시가 다 된 시간. 우리는 집 떠난 지
꼬박 이틀 만에 티카오 리조트에 도착했고, 티카오의 첫날 밤은 여정의 피곤함을 못 이겨 간단히 저녁 먹고 일찌감치 헤어졌다.
마닐라로 돌아오던
날 비행기에서 바라 본 마욘 화산
8월 1일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떼었다. 어젯밤 어둡고 피곤해서 보이지 않던 리조트 주변 경치가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필리핀의 다른 다이빙
포인트에서 느껴보지 못한 고요함이다.
어젯밤 미리 말해 둔
베이비시터가 도착했다. 포인트가 리조트와 떨어져 있어서 보통 세 탱크를 모두 방카에서 하고 돌아오는 방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어린 딸아이를 데려가는
게 무리라고 판단했다.
한국 나이로 다섯 살, 아직 네 돌이 채 되지
않은 어린 아이여도 엄마와 아빠가 다이버라는 자각을 하고 있다. 간밤에 아이에게 충분히 설명했고 이미 앞선 여행들에서 현지 보모
경험도 있었지만, 역시 아이에게 쉬운 일은 아니리라. 다행히 마녀키키님의 아들 승기와 형부가 있어서 한결 마음이 놓인다.
리조트 리셉션 옆 다이빙센터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장비 관리가 너무 잘 되어 있다. 지교님도 이렇게 철저하게 관리가 잘 되는 현지 숍은 드물단다. C카드도, 면책동의서, 나이트록스 탱크도 하나하나 비율을 체크하고 싸인까지 꼼꼼하게
다 확인하고 나서야 브리핑이 시작됐다.
이 일대 대표 포인트는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길쭉하게 생긴 섬의 위쪽 끝에 위치한 산미구엘 일대(편도 한 시간), 다른 하나는 티카오 해협 한가운데 위치한 만타보울(편도 30분)이다. 첫날이기 때문에 체크다이빙
겸 비교적 난이도가 낮은 산미구엘 쪽에 가기로 했다.
티카오 아일랜드의 아이들
Bobby's Wall
첫 번째 포인트는 바비스
월(Bobby’s
Wall). 산미구엘
동쪽에 있다. 포인트 주변 지형 경관이 끝내줬다. 드디어 입수! 수온은 전체 적으로 29℃ 정도, 3mm 웻수트 하나로 충분했고 시야는 기대보다 못했다. 대물을 보려면 역시 시야는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다만 사람 손을 덜
탄 곳이라 그런지 산호들이 건강했고 처음 보는 누디브런치가 많았다.
티카오의 갯민숭달팽이들
Baloy's Rock
두 번째 포인트는 발로이스
락(Baloy’s
Rock). 귀여운
산호 사이사이 귀여운 갑각류들이 자주 보인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이거다, 싶은 강한 한 방은 없다.
점심 식사 때는 웃음
만발이었다. 한국에서 마녀키키님이 어마어마하게 공수해 간 각종 김치, 나물, 레토르트 식품들에 라면까지 반찬은 푸짐했는데 수저 챙기는 것을
잊어서 우리는 모두 손으로 밥을 먹어야 했다. 그래도 배 위에서 먹는 파김치와 밥은 정말 꿀맛이었다.
티카오의 갑각류들
Uduc east
점심 먹고 들어간 세
번째 포인트는 Uduc east. 만다린피쉬가 있다는 말에 설레긴 했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요놈만 기다리다 나오게 될 줄이야. 제대로는 처음 보는
만다린의 고운 자태는 과연 소문대로 아름다웠다. 사진 찍는 일행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산호더미 속에 숨어서 한 시간 내내 숨바꼭질만 하는 녀석과 씨름했다. 나는 겨우 꼬랑지 사진
두 컷, 읔!
핑크아네모네피쉬
만다린피쉬
바다나리와 멸치 떼들이 있는 풍경
8월 2일
티카오의 하이라이트이자
우리가 먼 길을 온 목적인 만타 보울(Manta
Bowl).세 탱크를 다 여기서
하기로 했다. 메인 가이드인 G.L은 브리핑을 30분씩이나 하며 이 포인트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티카오 섬과 루손 섬
가운데에 위치한 만타 보울은 티카오 패스의 강한 해류가 지나는 길목이라 조류가 매우 강하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떠내려가면 하와이, 왼쪽으로 떠내려가면
몰디브로 날아간다던가? 따라서 조류걸이는 필수. 내 경우엔 조류에 쥐약이라 방카 타고 이동하는 동안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모르겠다. 안전을 위해서 카메라까지
두고 가기로 했다.
만타보울에서 만타를
기다리는 장소는 크게 세 군데다. 조류를 감안해서 입수하여 조류를 타고 만타를 기다리는 지점까지 흘러가는데 이게 웬일, 바다는 그야말로 장판, 조류는 행방불명. 사방 캐년같이 조류로
유명한 포인트들에 마녀키키님만 들어갔다 하면 조류가 사라진다던데, 언니가 또 조류를 잡쉈나? 나중에 들어보니 만조와
간조가 만나는 정조 때라 물의 흐름이 멈추었기 때문이란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날 세 탱크 모두 꽝. 바다에서 무얼 언제 만날지는 용왕님만 안다지만, 리조트 매니저는 만타보울에서 만타를 만날 확률이 90%라는데 우리는 참 운도
없구나. 일행들 기분이 다소 가라앉은 게 보인다. 내일은 만날 수 있을까? 있겠지?
연산호 군락
8월 3일
만타를 보러 왔으니
만타를 실컷 보기까지 포기할 수 없다! 이른 시간에 만타가 많이 나온다는 G.L의 말에 자는 딸아이를 언니네 방에 옮겨놓고 아침 6시에 출발. 조류는 오늘도 예상보다
약했다. 40분을 기다려도 만타는 나타날 기미가 안 보이네. 짝짓기 철인지 쌍쌍이 춤을 추는 작은 잭피시 무리를 만나 겨우
체면치레하고 아쉬운 마음 뒤로 한 채 상승 시작했다.
그 때 갑자기 아래에서
작은 만타가 한 마리 등장했다. 2m나 될까 싶은 아기 만타였다. 이미 일행들 반 이상은 출수하고 난 후라 남아서 만타를 본 사람들은 럭키~ 작은 녀석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출수 후 지교님 말씀이
베이비 만타는 성인 개체보다 만나기 힘들다고 한다. 그래도 내심 이 먼 곳까지 와서 만타 한 마리는 너무 야박한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은 숨길 수가 없다.
지나가는 만타
이제나저제나 하며 허탈한
마음으로 들어간 세 번째 탱크. 뿌연 바다 저 멀리서 드디어 큰 만타 한 마리가 등장했다. 일행들 모두 흥분하던 그 때 반대편에서 또 한 마리가 나타나고, 둘은 하이파이브인지
사랑의 춤인지 모를 지느러미 짝짜꿍을 하며 솟구쳤다. 와우! 나타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며 그렇게 6번 정도 우리 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래, 바로 이 맛이지! 무지님 내외분이 컨디션
난조로 못 보신 게 아쉽다. 반면, 다이빙 시작한 지 20회도 되지 않아 만타님을 영접한 좌측님 따님 지원이는 대박이다.
만타보울에서 만난 만타
8월 4일
점점 더 좋아지는 티카오
건만 벌써 마지막 날이다.오늘은
만타 몇 마리를 보려나 하는 기대를 안고 만타보울에 입수하자마자 가이드가 난리를 친다. 방카 바로 옆을 지나가는 거대한 것, 그것은 고래상어가 아닌가! 티카오는 돈솔 옆이기
때문에 겨울에는 고래상어를 보기가 쉽다고 하는데 지금은 고래상어 시즌도 아니어서 우리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건 말 그대로
횡재다.
고래상어는 유유히 우리를
지나갔다. 비록 더 이상의 만타는 볼 수 없었지만 자연산 고래상어를 다이빙 중에 본 게 만타를 본 것보다 더 큰 수확이니 우리는 충분히
흡족했다.
다만 이번 다이빙에서
특기할 사항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것은 출수 직전 만난 엄청난 하강조류였다. 평소 침착하던 인솔 가이드들도 굉장히 다급하게(물 속에서도 그 다급함이
느껴졌다) 일행들을 위로 올라오도록 유도했다. 사실 나와 남편은 이미 꽤 많이 올라와있었던 터라 강하게 하강조류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출수 후 이야기를 들어보니
발차기 한 번만 쉬어도 쑤욱 내려가는 강한 조류에 모두들 당황했다고 한다. 다행히 사고 없이 모두 빠져 나왔다.
수면휴식 때 보트맨들이
고래상어가 배 옆에 있다며 소리쳤다. 지교님, 남편, 마녀키키님이 차례로 뛰어들고 나도 뒤늦게 들어가서 방카에 매달려 녀석을 실컷 보았다. 아까 나왔던 그 녀석일까?
이 정도면 충분히 ‘그분’을 영접했다 생각했는데, 다음 다이빙 때 고래상어는
다시 나타나 주었다. 세 번째로 본 고래상어라 다들 이번에는 조금은 침착하게 각자의 카메라로 고래상어를 담을 수 있었다. 게다가 우리를 지나가다
다시 빙 둘러 돌아와주는 센스. 고래상어가 지나간 후 물 속에서 다들 춤을 추고 난리도 아니었다. 바로 머리 앞까지 지나가준 고마운 녀석 덕분에 며칠간 느꼈던
아쉬움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출수 후 우리가 이렇게 복이 많은 다이버들이라며 기쁨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포인트 이름을
만타보울에서 웨일샥보울로 바꾸어야겠다.
다시 되돌아와준
고래상어
고래상어의 뒷
모습
티카오에서의 마지막은
나이트 다이빙으로 마무리됐다. 칠흙 같이 어두운 한밤 중에 마른 번개까지 내리치니 묘한 긴장감이 어렸다. 시야는 무척 나빠서 한치 앞만 보이는 정도였지만 처음 보는 누디브런치들과
무수히 많은 갑각류 잔치로 조금도 지루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물고기 사냥 중이던 갑오징어와
산호 속에 숨어있던 핑크색 프로그 피시였다.
남편은 나중에 내가
찍은 프로그피시 사진을 보고 눈물 흘리는 에어리언 같이 못생겼다는데, 그 못생김이 프로그피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하는 매력 포인트라구! 평균 수심 3m
내외라 90분 다이빙을 했는데도
시간이 어찌 흘렀나 싶을 정도로 즐거웠다.
고기를 포식하는
갑오징어
붉은 입술의
섹시한 씬벵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
알았으면 좀 피곤하더라도 일정 중에 한 번 더 나이트를 하는 거였는데. 즐거운 마지막 다이빙을 마치고 우리를 맞아준 건 쏟아질 것 같은
별들과 은하수였다. 온통 까만 밤하늘에 보석처럼 박힌 무수한 별들은 내가 물 위에 있는지 우주 속에 있는지 헷갈리게 할 만큼 환상적이었다. 우리가 아름다운 풍경에
푹 젖을 수 있게 보트 스태프들은 작은 등불조차도 모두 꺼주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다이빙이었다.
티카오의 석양
밤 하늘의 은하수 다이빙도 만족스러웠지만 티카오 리조트는 투철한 서비스 정신으로 우리 모두를 감동시켰다. 리조트가 꽤 크기 때문에 많은 리조트 식구들이 상주하는데 분업과 협업이 잘 되어 있고 직원들은 항상 웃으면서 모두에게 친절했다. 다이빙센터 스태프들도 최대한 우리의 요구사항과 편의를 들어주었다.
게다가 승마(무료!)나 반딧불이 투어 같은 가족 여행에도 적합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서 비다이버들도 함께 하기에 큰 무리가 없다. 딱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수영장이 없다는 것 정도?
티카오아일랜드의 메인 리셉션 & 레스토랑
티카오아일랜드의
레스토랑겸 바를 겸하고 있다
티카오아일랜드의
카바나 숙소
펀다이브아시아
다이빙 숍은 깔끔하게 잘 정리 정돈된 느낌이었다.
티카오 리조트 직원들과
아쉬운 석별의 인사를 나누고 다시 배를 타고 레가스피로 돌아가는 길은 파도를 잘 타서인지 한 시간 만에 수월하게 갔다. 레가스피에서 제일 좋은
오리엔탈 레가스피 호텔에 짐을 풀고 다들 마욘산 근처로 ATV를 타러 갔다. 나와 딸아이는 참여하지 않고 호텔에서 쉬었는데 5시간이 지나서 돌아온
남편은 쌍엄지를 쳐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30분 정도 시늉만 내는 국내 ATV와는 차원이 다르다며 온몸에 오프로드를 질주한 흔적을 잔뜩 묻혀왔다. 일행들 모두 만족한
3시간짜리 오프로드 ATV는 단돈 1300페소.
마욘산 ATV 트레킹
다음날 오전, 좌측님과 지원이는 먼저
귀국길에 올랐고 남은 일행들은 마욘산이 환히 보이는 전망 좋은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도 하고 사진도 찍으며 여흥을 즐겼다. 국내선을 타고 다시
마닐라로 가서는 에어비앤비 아파트를 빌려 마지막 하루를 일행들과 같이 보냈다. 하루만 더 기다려줬음 좋았을 폭우로 근사한 외식은 못했지만 직접
해먹는 식사도 오래 기억에 남을 만 했다.
Remind, Refresh, Restart. 이번 티카오 여행은 그렇게 모든 것이 충만한 여행이었다. 사랑하는 가족이 옆에
있고 일행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으며 그 속에 행복한 내가 있었다. 설령 어려움과 부족함이 있었다 해도 그건 여행의 필수 양념과
같은 것, 그런 것이 있기에 우리는 그곳 티카오를 다시 찾게 되지 않을까.